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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그대로... 박래군만 감옥에 갔다
재야의 인권운동가, 모란공원 동생 곁에 용산 희생자 묻다
10.01.14 14:57 ㅣ최종 업데이트 10.01.14 15:38 전관석 (sherpa74)

아마 상계동을 비롯한 웬만한 철거지역 '청소'는 모두 끝났을 때였을 것이다. '철거민', '재개발'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 1988년이었다.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눈과 귀가 막힌 국민들은 곧 들이닥칠 외국인 손님맞이에만 분주했을 테다.

 

태극 문양의 끝을 곱게 말아돌린 대회 심볼, 상모를 쓴 호돌이가 '경축 24회 서울올림픽대회' 문구와 함께 육교에 다닥다닥 붙여지는 등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바로 그해 6월 4일 오후 4시경,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 한 학생이 올라가 외쳤다.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그는 곧 자기 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그었다. 분신. 그의 옷이 빠르게 타들어가 몸에 엉겨붙었고 불길은 곧 온 몸에 퍼졌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검은 몸뚱이로 한강성심병원에 옮겨진 그는 죽음의 문턱을 몇차례 오가다가 결국 이틀만인 6월 6일 12시 23분 숨을 거뒀다.

 

이 대학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던 박래전.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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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4일 분신한 박래전 열사 노제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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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묻힌 박래전 열사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시커멓게 탄 동생을 지켜보던 스물 여덟 문학청년

 

숭실대를 위시한 서울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박래전이 외쳤던 구호를 함께 외쳤고 거리 곳곳에 붙어있던 호돌이를 떼어내 태웠다. 그의 영정 뒤로는 "열사정신 계승" 펼침막과 수많은 만장이 뒤따랐다. "살인정권" "민주주의" 함성이 거리를 메웠고 학생들은 최루탄에 신음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스물 여덟이던 그의 둘째형은 시커멓게 탄 동생의 목숨이 꺼져가는 순간을 지켜보며  오열했으리라. 형과 가족은 동생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했다. 당시 아직 환갑도 지나지 않은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땅에 들어간 그의 관 위로 흙을 뿌렸다. 한 명의 열사가 또 그렇게 검은 몸을 이끌고 하늘로 갔다.

 

동생의 죽음은 연세대 문학회 소속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문학청년 둘째 형의 삶을 뒤바꿔놓는다. 1987년 첫 수감지였던 대전교도소에서 목격한 비전향장기수들의 견결한 삶이 형의 고민을 깊게 만들어 놓았다면 이제 동생의 죽음이 그에게 또렷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형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아래 유가협) 활동을 시작으로 인권운동사랑방에 몸담으며 그간 '대한민국에 도입될 수 없는 개념'이었던 '인권'에 천착하게 된다. 90년대 초, 제 몸을 불사른 꽃다운 청춘 50여 명의 장례를 도맡아 열사들의 하늘길을 배웅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시나브로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대학 문학회 절친 우상호가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다. 마치 학생운동생활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사람들이 '당'으로 '정'으로 '청'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인권 현장을 지켜왔다. 어쩌면 형의 시대적 책무는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에게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킬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으로 몇 개월 일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2001년엔 '독립적인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며 명동 성당 들머리에 스티로폼을 깔고는 다른 인권운동가들과 노상 단식투쟁에 나섰다.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지만 침낭만 덮고 맨 바닥에서 날을 넘겼다.

 

심지어 2002년 3월 경기도 평택의 장애인 시설 에바다 농아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는 비리재단 측으로부터 똥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에바다 장애인들의 인권수호 의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동생 죽은 지 21년, 남일당 건물에서 다시 불에 타 숨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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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3월 19일 에바다 사태를 해결하고자 에바다농아원을 방문한 박래군 이사(오른쪽)와 박경석 이사가 농아원측 관계자들로부터 똥물세례를 받고 망연자실해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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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8년 6월 6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었던 박래전 열사 안장식. 하관 후 백기완 선생이 관 위로 흙을 뿌리고 있다.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2006년에는 평택 대추리에서 인권지킴이 활동을 하다가 조백기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와 함께 구속되기도 했고 2008년 새해 벽두 인수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기구 전환을 꾀하자 주저없이 다시 명동성당 바닥에 누웠다. 

 

어느새 그는 대한민국 인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거창한 직책과 직위도 없었다. 그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일 뿐이었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만한 높이의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몸에 불을 맞아 검게 숨졌다. 그의 동생이 그리 된 지 21년 여가 흐른 뒤였다. 

 

정권과 사법기관, 언론은 본질을 싹 덮고 현상의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돌렸다.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현장은 을씨년스럽게 방치됐다.

 

공포와 은폐는 인권의 반대개념. 당연하다는 듯 형은 맨 앞에 나섰고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형은 참사 직후인 2009년 1월 23일 <인권오름>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올해 봄에는 모든 진보운동이 인권운동이 될 것 같다. 권리를 잃은 시대, 폭력이 극단적으로 난무하는 시대,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받는 시대에는 권리를 찾는 모든 운동이 인권운동이 된다. 그야말로 인권은 저항의 언어가 되고, 저항의 논리가 된다... 이런 봄을 그린다면 이 겨울이 춥지만은 않다. 그런 봄을 이 겨울에 준비해보자. 봄은 준비하는 자의 가슴에서부터 오지 않겠나."

 

그러나 춘래불사춘. 그가 그린 봄은 그 해에 오지 않았다. 결국 계절을 한 바퀴 돌아 2009년을 하루 남기고서야 겨우 용산 희생자 장례 일정에 합의할 수 있었다. 총리는 유감 표명의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3000쪽'과 '진상규명'은 끝내 염원으로만 남았다. 1년간 냉동고 안에 있었던 시신들은 해를 넘겨 2010년 1월 9일에서야 좁은 서울역 광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범대위 활동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수배의 덫에 걸린 형의 삶도 내내 겨울이었다. 우선 동생의 추모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4월 4일 숭실대 추모식에도, 6월 6일 모란공원 추모식에도 형은 갈 수 없었다. 단 한번도 빠지지 않은 행사였다. 대신 형은 편지 한 통을 동생의 벗들에게 전했다.

 

"요즘 제 심경이 참으로 착잡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함께 해야 하는데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 이렇게 글로서나 제 얘기를 전할 뿐입니다. 제 동생 래전이가 바라던 세상이 제가 가는 인권운동의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이 길이 종종 힘들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만이라도 같이 하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올해도 어김없이 래전이 묘소를 찾아줄 이들이 있기에, 이 힘겨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 대신 동생의 영전에 소주 한잔 올려주시고 담배 한 개비 태워주십시오. 그리고 죽은 동생 생각에 더해, 만날 수 없는 처지의 저 때문에 더욱 서럽게 우실 어머니를 꼭 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 동생 아직도 스물여섯의 얼굴로 여러분을 맞지만 그가 살았다면 벌써 마흔 일곱 장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제 동생과 소주 한잔 하면서 밀린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제 대신 동생의 말벗이 되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2009년 6월 래전이 둘째형 래군"

 

9개월여 병원 영안실과 명동성당 영안실에서만 지내던 그에게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들을 마석 모란공원에 모신다"는 결정이 전해졌을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동생을 그 곳에 묻고 22년, 인권운동에만 매진했던 그에게 이 어처구니 없는 '반복'은 믿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다. 형은 그의 동생 곁에 다시 다섯 '형제'를 눕혔다.

 

유가족들의 삼우제가 끝난 1월 11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나온 그는 "씩씩하게 다녀오겠다"면서 스스로 경찰 호송차에 올랐다. "세입자 철거민들의 권리는 여전히 개발이익이라는 공룡에 희생되고 있다"면서. "용산참사의 완전한 해결은 이 같은 문제들까지 함께 해결하는 것"이라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열사의 뜻을 이어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 세입자들의 권리옹호를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면서.

 
우리 시대 인권 상징이 구속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심드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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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3시 이종회·박래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남경남 전철연(왼쪽부터) 의장 등 용산참사 관련 수배자 3인이 경찰에 자진출두하면서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박효원
용산 참사

박·래·군.

 

박래전의 둘째 형 박래군은 그렇게 끌려갔다. 그의 후배인 시인 나희덕은 박래군에 대해 이렇게 썼다.

 

"... 졸업 후 누구는 언론인이 되었고 누구는 교사가 되었고 누구는 학원강사가 되었고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누구는 주부가 되었고 누구는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박래군 선배는 어떤 생업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지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모두가 꿈꾸었지만 끝내 가지 못한 길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그리고 변함없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졸업 후에 그를 몇 번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를 우리 사회의 정의를 잴 수 있는 척도로 여기고 있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중에서)

 

예상된 바 박래군이 결국 구속됐다. 경찰은, 그가 눈감고도 줄줄 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사례를 조목조목 들이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다.

 

소설가 김별아가 <한겨레>에 쓴 글을 제외하고, 언론은 그의 구속 소식을 짧은 단신으로만 전한다. "우리 사회 정의의 척도"가 갇혔는데도 사회는 심드렁하다. 마치 사태의 '일단락'이라는 듯. 어쩔 수 없는 '귀결'이라는 듯.

 

우리는 용산사태 해결에 미온적인 정권에 분노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재개발의 달콤한 유혹에 또 얼른 귀를 연다. 인권이 옅어지는 사회를 격하게 통탄하지만,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대표되는 욕망은 계속 부풀어 오른다. 인권의 가치를 격하시키지는 않을지언정 결코 그것을 돈의 가치와 함께 저울에 올리지는 않는다.  

 

박래군의 발을 묶은 사람은, 그에게 풍찬노숙을 강요한 사람은 그리고 그를 기어이 감옥에 넣은 사람은 결국 우리 아닌가. 그의 동생 박래전이 산화한 지 22년, 박종철이 죽은 지 오늘로 꼭 23년. 당시 거리에서 열사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피터지게 싸웠던 대학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시대, 하지만 그 의지는 이미 희미해졌고, 대신 평생 그 의지만 붙들고 산 사람은 감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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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6월 동생 박래전 열사 추모식을 맞아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묘역에서 분향하고 있는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그는 수배로 인해 2009년 처음으로 추모식에 불참했다.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1988년 50대 나이에 박래전의 관 뚜껑에 흙을 던져넣었던 백기완은 2010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용산참사 희생자 범국민장에서 조사를 읽었다. 군부독재는 오래전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열사정신 계승" "민주주의 수호" 만장은 유효하며, 마석 모란공원에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사회. 모든 게 그때 그대로인데 늘 차가운 거리에서 고생하던 박래군만 감옥에 갔다.

 

그의 구속 다음날, 서울고법이 용산참사의 미공개 수사기록을 변호인에게 공개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검찰이 반발하고 있지만 머잖아 그 '3000쪽'의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시 그가 봄을 그릴 수 있는 것일까? 이 지독한 추위를 밀어내고 봄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일까? 하기야 늘 "냉동고에 1년이나 있던 그 사람들은 얼마나 추웠을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가 아니었던가. 다가올 봄은 분명히 박래군의 가슴으로부터 올 것이다.

 

'동화'라는 시 한편을 그에게 보낸다. 그도 오랜만일 것이다. '겨울꽃'. 그의 동생 박래전이 살아있을 때 지었다는 시다. 그가 빨리 나와 모란공원의 여섯 영정 앞에 깊은 절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冬 花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봄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Posted by 메달

저항만이 양심이다

용산참사 삼백일을 하루 앞둔 날

오도엽(시인)  / 2009년11월14일 22시32분


눈이 있으나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눈먼 이의 땅
귀가 있으나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 귀먹은 이의 땅
입이 있으나 정의를 말하려 하지 않는 입 다문 이들의 땅
법이 있으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꼭두서니들의 땅
국가는 있으나 국민은 존재한 적이 없는 허무의 땅
죽었으나 흙에 묻혀 넋이 떠나지 못하는 냉동의 땅
결국 용산 4구역 남일당 앞 은행나무는 더 이상 은행을 맺지 못한다
불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천구년 일월 이십일 아침 여섯 시 이후론 용산은 세상의 시계를 멈추게 했다
겨울이 지났고 봄이 왔으나 달력은 찢기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 왔으나 시계 바늘은 여전히 그 자리다
여름 가고 가을 왔으나 검은 옷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덧없는 숫자만을 세고 있다
한 달 백일 이백일 그리고
이천구년 십일월 십사일 용산4구역 남일당에서 이백하고도 아흔아홉 날
눈멀고 귀먹은 땅의 분향소에는 외로이 국화 향기 피어나고 있다
보아라 허나 나는 밥을 먹고 있지 않는가
들어라 허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는가
시를 쓰고 있고 그림을 그리고 있고 돈을 벌고 있고
불임의 땅에서 밤에는 사랑을 나누고 있지 않는가

가을 가고 어느덧 그날의 아침처럼 매서운 바람 부는 겨울이다
불길 훨훨 타오르는 망루다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용산의 절규는 평택 쌍용자동차에 울리고 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반도의 땅 혈맥에서 신음하고 있다
단식에 삼보일배 기자회견에 국민대회 허무한 불법 되어 범법자만 난무하다
지독한 저항은 거짓 눈물과 위장 부도를 계획한 약속에 철저히 겁탈 당하고 있다
나의 무능의 부끄러움을
나의 침묵의 비겁함을
이젠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홀로 도망가기 겁나 옆 사람의 손목마저 잡고 있지 않는가

이미 한의 눈물은 남일당 옥상 망루를 훌쩍 넘겼다
이미 분노의 목소리는 인왕산 아래 푸른 기와 서까래를 흔들고 있다
이젠 한 걸음이다 이젠 한 사람이다
내가 한 사람이 되고 내가 한 걸음만 나서면 된다
용산 참사 삼백일을 앞둔 오늘
한 사람의 한 걸음을 더하고 더해
마치 오랜 된 과거처럼 지우고 싶은 내 몸 안의 독재를 버리고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내가 있다
여기도 사람이 있다
여기 우리가 있다
떨쳐 있어서면 된다 삼백일이 별 거냐
기념하거나 기억하지 말자
이미 멈춘 시간들 오늘이 첫날이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지독한 저항으로도 안 된다면 별 거 있나
더 더욱 더더욱 지독스럽게 할퀴고 찢으며 달려들면 그만이다
눈먼 이들의 땅 귀먹은 이들의 땅 입 다문 이들의 땅
꼭두서니들의 땅 허무의 땅 차가운 냉동의 땅
불임의 땅 용산에 눈물의 망루가 아닌 희망의 망루를 쌓고
끈질기고 악착스러운 지독한 저항을 하자
저항만이 양심이다
저항만이 민주주의다

Posted by 메달



설마가 진짜가 되었네~

- 좌충우돌 홍콩 아시아 인권위 인권학교 참가 후기

 

현재 대통령을 하도 잘 둔 덕분에 일복이 넘쳐나 하루에도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던 어느 날...

나보다 한 10배쯤 바빠 보이는 한 활동가가 급 이런 말을 꺼냈다.

‘나 홍콩 갈까?’

대뜸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귀를 쫑긋 세웠더니 결론은 놀러간다는 것은 아니었다. 홍콩에 ‘아시아 인권위’라는 단체가 있는데 6월 말에 그곳에서 아시아 지역 인권활동가들이 모여서 각 나라 인권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토론도 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활동가 참여자로 그 분이 추천되었고 같이 활동하는 다른 활동가들도 적극적으로 그 분의 등을 떠밀었다. 사실 그 자리를 봐서 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서 잠시 떨어져 생각도 정리하고 돌아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 분도 이래저래 복잡하지만 홍콩을 가기로 결정했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또 어느날..

홍콩을 가기 이주일 전이었던가? 급 이렇게 물어왔다.

‘야 홍콩 너가 가면 안돼냐? ^^’

‘엥? 이게 무슨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설마 나보고 진짜 가라는 것은 아니지?’

사실 그런 기회를 다 마다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인권 활동을 하면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는 어떤지, 다른 나라 활동가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고 배우고 싶은 생각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설마가 진짜가 되었고 어쨌든 갔다 왔다는 것이다. 어찌 어찌해서 가기로 맘먹고 홍콩 쪽 상황도 들어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의견을 구하니 가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긴장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 없이 가는 자신감 부족과 그 동안 갈고 닦아 놓은 언어도 없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2주의 시간동안 최대한 준비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한국 상황을 이야기할 자료도 찾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문제는 좋은 영상이 있더라고 자막 작업이 쉽게 될 수 없었다. 결국 최대한 말로 잘 풀어 보기로 하고 홍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떨림이었다.

 

홍콩에 무사히 도착하고 난 후 일정표를 좀 더 세밀하게 훑어보았다. 사실 대충 국제인권회의정도의 상을 그리고는 갔지만 부끄럽게도 행사 전체 제목도, 단체성격도 제대로 모르고 갔다.

3년이 넘게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국내가 아닌 다른 국제적인 인권단체에 대한 관심이나 고민은 그닥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UN인권위나 국제엠네스티 정도였다. 아시아 인권위 또한 이번기회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1984년에 만들어져 나름 오랫동안 활동을 만들어온 단체였다. ‘아시아 인권위 folk school'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시아 인권위가 주최하는 인권학교라고 해야하나? 아시아 인권위(AHRC)에서 해마다 이런 자리를 만드는데 올해가 가장 긴 일정(3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인권학교를 다양한 국가 활동가들을 모아서도 하지만 원하는 국가나 지역이 있으면 찾아가서 인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3주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은 이렇다.

인권활동가는 어때야 하는지, 인권운동을 하면서 부딪히는 지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을 했다. 구체적으로 의제별 토론으로 들어가면서 자유권(ICCPR) 그 안에서의 신체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표현의 자유 등을 이야기하였고, 사회권(ICESCR) 속에서 개발의 문제, 노동권, 식량권, 교육권, 건강권, 여성권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각 나라별 상황과 인권문제에 대해서 서로 공유하는 자리도 가졌다. 물론 한국에 상황도 이야기하였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하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 후퇴와 여러 가지 반인권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다행히 현지 한국 활동가 분이 많은 도움이 되어서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식 프로그램은 아니였지만 용산참사를 그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영화 편집 본 영상도 함께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몇 몇 활동가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함께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지만 참가한 활동가들도 다른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국제적으로 큰 사건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활동가들은 한국은 나름 ‘국가인권위회’도 있고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군사정권, 군사주의 속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저널리스트, 활동가들이 고문 등 인권침해를 당하고 심지어는 아무도 모르게 암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시기적 차이만 있을 뿐 과거 우리나라 군사정권 때 도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가. 어디를 가나 지배 권력의 야만은 비슷한가 보다. 결국 ‘인권’의 중심에서는 국적은 필요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인권이 바로 우리의 인권이고 우리의 인권이 그들의 인권이기에...

 

또한 홍콩에서 정부와 민간 기업들의 부패와 비리를 감시, 견제하는 홍콩 부패방지위원회(ICAC)도 방문하였다. 한국도 부패방지위원회가 있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홍콩 ICAC 역사와 기능 역할 등에 대해서 들었는데 한국과 질적으로 달랐다. 한국의 국가인권위도 그렇지만 어떤 국가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기관이 그 일을 하기위해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인권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미디어 활용방법에 대한 교육 시간도 있었다. 참고로 이번 교육 끝나고 돌아와서 가장 처음에 한 것이 ‘gmail’ 메일주소를 만들었다. 한국정부의 무시무시한 개인정보 압수수색도 그렇고 글쎄 참가자중 나만 ‘gmail’을 안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알고 보니 ‘gmail’이 압수수색에도 강하지만 ‘구글’이 여러모로 활용할게 많이 있었다. 언어만 어느 정도 된다면 ‘구글’을 통해 국제 활동가들과의 커뮤니티나 소통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국내의 상황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3주라는 시간이 언제갈까하고 많이 부담스러웠는데 지나고 나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사실 초반 3일은 죽을 것 같았다. 말은 못 알아듣겠지 아는 사람은 없지..그래도 그냥 보내기는 아까운 시간이기에 아는 단어가 나오길 바라며 귀를 집중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더라. ^^ 하루의 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혼자 걸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되뇌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부담의 마음은 버리고 할 수 있는 만큼 느낌이 오는 만큼 하기로했다. 그러니 사람들과도 손짓발짓 눈빛으로도 친해 질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설마로 시작해서 진짜가 된 이번 경험이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3주의 시간을 여기에 고스란히 닮을 수 는 없지만 그때의 기억과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만들어 가고 싶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열정적으로, 조금 더 여유롭게 나의 길을 가고 싶다. ‘인권’과 ‘인권운동’ 그리고 ‘삶’이라는 이 세 가지가 아직 내 인생에 착 달라붙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눈길이 가는 그것이기에 좀 더 열심히 찾아보겠다.

요즘 뜨는 광고처럼 ‘wow'라는 감탄사가 'olleh(ole)'로 터져 나오기를 바라면서...

olleh~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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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7099&CMPT_CD=P0000

 

감사합니다, 스님...- 김진혁PD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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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에세이 『참 서툰 사람들』

글     박광수
낭독  김지수
피아노 : 구혜선
♬ 구혜선 자작 즉흥곡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대화에서 서툴다.
어떤 사람은 화해에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이별에 서툴다.
어떤 사람은 일이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젓가락질이 서툴다.
어쨌든 그들은 서툴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스스로 괜히 못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 서투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상일이 원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법인데
잘 풀리는가 싶다가도 꼬이기 일쑤인 게 인생인데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계속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바람둥이도 차일 때가 있고,
아무리 말을 잘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서투르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다만 서투르다는 사실을 느끼거나 인정한다면
나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지자.
서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너무 인색하다.
서툴다는 것은 죄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서툰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미 서툰 사람이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모르는 그래서 잘 배우려는 학생일 뿐이다.
그러니 조금만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자
그것이 바로 서툰 사람들이 손톱만큼이라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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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외수
낭독   구혜선
기타 : 서정실
♬ <Etude in A Minor Op.60, No.7> ... M. Carcassi 曲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신중하라.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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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은자 모두 유죄- 노희경 에세이

우연히 약속 시간이 남아서 서점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책이다.
노희경이라는 이름 하나로 책에 대한 애착심은 충분했다.
우선 책을 집어들고 읽기시작해서 하루만에 다 본것같다.(사실 난 책읽기를 좋아하지도 즐겨하지도 않는다. ㅋ)
노희경 작가가 쓴 드라마는 거의 다 본것같다. '거짓말'부터 얼마전에 끝난 그들이 사는 세상까지'...
그녀의 드라마 안에는 아주 씨니컬하지만 넘치는 휴머니즘이 있고 삶에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다.

에세이니 만큼 그녀의 일생에 대해서 이주 솔직하고 감성적으로 잘 녹여져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 내용에 나오는
주인공 나래이션도 노희경 작가가 작가를 준비하면서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것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한다.

책은 아름다운 그림과 시와 글이 잘 어우러져있다. 책 내용중 일부가 눈에 들어와서 적어본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선 드라마가 세상을 조금 아름답게 만들수있다는 믿음 때문에 글을 쓰신다고 했다. 나 역시 그것이 드라마를 쓰는 이유다. 혹자는 이 드라마를 두고 역겹다고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쓴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 어느 누구도 나와 다르다고 해서, 소수라고 해서, 소외됐다고 해서 손가락질 받을 이유는 없다.

나는 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칠 것이다.

언제나 소수의 편에 서라.
너와 다른 사람을 인정해라.
소외된 사람에게 등 돌리지 마라.
그리고 혹 네가 소수에 끼는 사람이 되더라도,
소외받는 사람이 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넌 왜 동성애자가 됐냐?"

"당신은 왜 이성애자가 됐습니까?
당신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늙어가고,
회사에서 밀려나는 게 당신 뜻이 아니었던 것 처럼..."

<지금사랑하지 않은자 모두 유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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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한 인간보다 확실한 인간이 되고싶다.
두려움을 이기고 싶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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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광
     - 영화 <스카우트>중에서

글       김현석
낭독   박철민
아코디언 : 신지아
                        ♬<Tico Tico>... Zequinha Abreu 曲

나는 비광
섯다에는 끼지도 못하고,
고스톱에선 광 대접 못 받는
미운오리새끼

나는 비광
광임에도 존재감 없는 비운의 광.
차라리 내 막내 비 쌍피가 더 인기 많아라.

하지만 그대,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주오
그대가 광박 위기를 맞을 때 지켜주는 것은
나 비광이요.
그대의 오광 영광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은
나 비광인 것을.

나는 비광.
없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슬픈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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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중 낭독]
문신

철없던 시절,
내 몸뚱어리는 도화지였네
처음 그렸던 것이 진돗개.
형님한테 평생 충성하고 싶어서였네.
두 번째 그린 것이 고양이
호랑이 그리려다 잘 못 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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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2]
소설 『태백산맥』중에서

글       조정래
낭독   박철민
피아노 : 이 경/ 아코디언 : 신지아
                         
♬<꽃밭에서>...  권길상 曲

광조는 씨익 웃으며 덕순이의 손을 잡았다. 둘이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똑 엄니 한숨맹키로 길다.”
광조가 불쑥 말했다.
“머시가?”
덕순이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방죽 말이여.”
“방죽이 엄니 한숨맹키로 길어?”
덕순이는 의아해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죽길은 끝없이 뻗쳐 있었다.
동생은 어째서 어머니의 한숨을 저 방죽길처럼 길다고 했을까.
어머니가 밤낮없이 내쉬는 한숨을 이어놓으면 방죽길만큼 길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도 못 들어간 쪼깐헌 것이…… 덕순이는 그런 생각을 하는 동생이 갑자기 철들어보이기도 했고 건방지게 느껴지기도 해서 입을 삐죽였다.

포구에는 물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갈숲만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아부지는 얼굴도 몸도 뻘건 디는 하나또 웂는디 워째 사람들은 아부지보고 빨갱이라고 헐까?”
덕순이는 대답이 난감해졌다.
공산당의 이름이 빨갱이인 줄만 알았지, 어째서 빨갱이라고 하는지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공산당 이름이 빨갱이제.”
“글먼 성이 공산당이고?”
“금메……?”
덕순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디 워째 순사나 군인덜 이름이 파랭이가 아녀?”
“고런 걸 나가 워치께 아냐.”
덕순이는 그만 짜증스럽게 내쏘았다.
“학교 댕김스롱도 고런 것도 몰러?”
“학교서는 고런 것 안 갤친께 모르제.”
“치이, 니 공부 잘헌다는 것 순 그짓말이여. 다 넘덜 시험지 보고 써서 점수 잘 받은 것이제.”
덕순이가 동생의 손을 홱 뿌리치며 걸음을 멈춰섰다.
“니 참말로 분 질를껴?”
동생을 노려보고 있는 덕순이의 기세는 안고 있는 단지를 곧 내동댕이칠 것만 같았다.
“누나는 고런 걸 다 안 줄 알었는디……”
광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금방 기가 꺾이는 동생을 보자 덕순이는 마음이 짠해졌다.

“누나, 나 똑 하나만 허고 잡은 일이 있는디.”
광조가 덕순이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또 무신 뜽금웂는 소리 헐라고 그러냐?”
덕순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그 아무도 웂는 디서 아부지럴 목 터지게 불러보고 잡은디……”
누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광조의 눈은 간절했다.
“그려, 나랑 항꾼에 허자.”
덕순이는 안고 있던 단지를 마른 풀섶에다 내려놓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근디 말이다, 읍내럴 보고 소리질르먼 안돼야.” 덕순이는 읍내를 후딱 돌아보며 말했고, “하먼 순사가 들으먼 워쩌라고.” 광조가 재빨리 대꾸했다.
“하나, 둘, 셋 허먼 항꾼에 허는 겨. 자아, 하나아, 두울, 셋!”
아부우우지이이이 -
선수머리를 향해 선 덕순이와 광조는 허리가 차츰차츰 구부러져 반으로 접힐 때까지 목청을 뽑고 있었고, 바람은 둘이의 긴 외침을 멀리멀리 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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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중 낭독]

“아이고 요런 문딩아, 공산당 헐라먼 애시당초 장개럴 들지 말든지, 장개럴 들었으면 새끼덜이나 싸질르지 말든지. 지리산 호랭이가 칵 씹었다가 도로 뱉을 요 문딩아, 나만 새끼들허고 어찌 살라고 혼자 내빼능겨.”
              -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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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3]
목마와 숙녀

시      박인환
낭독  박철민
피아노 : 이 경 / 아코디언 : 신지아
   ♬ <L’hymne A L’amour> ... Marguerite Monnot 曲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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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추모행렬을 바라보며.

 

돌아가다. 돌아가시다. 아마도 ‘돌아갔다’의 뜻은 원래 있던 곳, 제자리로 다시 갔다는 뜻일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사람의 죽음 앞에 ‘돌아갔다’라는 표현을 쓴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다.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갔다. 천주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종’.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사무실이 바로 명동성당 근처인지라, 사무실 바깥을 나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왜냐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기 때문이다. 두 세시간씩 밖에서 서 있다 보면 사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며 재미거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참으로 뻘쭘할 뿐이다. 게다가 두 세시간씩 서 있다보면 안 그래도 추운데 마려운 오줌은 더 마렵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큰 건물 화장실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하고, 우리가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다른 회관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4일 동안 업무중지하고 화장실 안내만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야박해보일지라도 냉정하게 ‘회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 주세요’라고 했다.

 

 

나의 영혼이 절반은 가출한 상태로 멍해있고 피곤했던 나는 몹쓸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올랐다. 아놔. 줄 서 있는 사람이 대략 2km는 족히 되어보였다. 세종호텔 다음 건물을 끼고 골목까지 돌았으니 말이다. 그때 시간이 대략 11시. 허허허..나는 명동역으로 가서 카드를 찍고 플랫폼까지 내려갔다. 또 아놔.. 보이는 건 까만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쫘악 깔려있는 것이다.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돌려 다시 카드를 찍고 나와서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옷에 ‘근조’핀을 꽂고 있는 사람들이 택시를 잡고 있었고, 이곳은 콜택시를 불러도 불가능해보여 을지로입구역으로 갔다. 뭐, 별반 상황이 다를 건 없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으로 콜택시를 불렀는데 정말 운 좋게 십분 뒤 탑승 성공 했다. 택시기사분께 이 택시를 타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리니 아는 택시 기사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명동에 손님이 많다고 빨리 가라고 보챈다. 뭐, 누구는 일산 화정에 있어서 못간다나 어쩐다나..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깊은 신앙심이 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고백성사라는 건 언제 봤는지 까마득하고, 예수는 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제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며(정말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이 보수적인 한국천주교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할 뿐이다.

 

 

방금 뉴스를 보니 대략 20만명의 사람이 조문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어떤 면상을 들고 나타날 용기가 있었는지 전 재산 29만원 전두환이도 왔다갔다. 죽은 사람 앞에 나타나서 인사하면, 지나간 과오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마치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역사와 화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걸까. 전 재산 29만원 전두환이는 까만 쎄단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늬 총머리로 죽어간 사람들 앞에도 그렇게 나타나 조문을 할 수 있겠냐, 고 텔레비전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씨발놈.

 

김수환 추기경은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당시 그는 민주화운동의 큰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그는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실망을 더 안겨주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상세한 내용은 뭐 쓸 필욘 없겠다. 종교를 떠나 김수환 추기경은 어쨌든 큰 위안이 되어주었던 사람이었던 건 맞는 것 같다.

 

 

과연 천주교의 거물이 선종했기 때문에 20만명의 사람들이 두 세시간 씩 찬바람 맞으며 서서 기다리며 조문을 하는 걸까? 천주교 신자로서 추기경이 선종했으면 당연히 조문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 이틀동안 바로 옆 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정리된 생각은, 단순히 종교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싫든 좋든 저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비단 천주교 신자들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 앞에 슬퍼하고 아쉬워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나이가 들면 죽는 건 당연한건데, 마치 자기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슬퍼하고 추모한다. 왤까. 왤까.

 

 

지금의 이 시대.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최근 몇 년간의 행적이 아닌, 그 때 받은 그 위로들을 기억한다. 다시 비슷한 시대가 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그 때의 그 위로를 떠올린다. 일종의 위로와 위안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억울하고 차가운 마음들을 받아줄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문전박대를 당하고 어디를 가도 87년 그 때나 지금이나 쌩떼거리 쓰는 짓으로 치부되는 건 매한가지다. 누구에는 떼쓰는 것처럼 밖에 안 보여도 그 누구에게는 그 사람의 삶이 걸려있는 절박함, 누구에게는 문전박대해서 내보내도 괜찮겠지만, 그 누구들에게는 더 이상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절박함. 이 절박함을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안아 줄 곳이 없다. 이 서러움을 풀 곳이 없다. 가슴 한 켠 쓸어내려주는 손길이 없다.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행렬을 보며 사람들은 단순히 김수환 추기경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짓밟아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세상, 내가 이기지 않으면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는 세상, 87년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고 했던 그곳은 툭하면 경찰이 막아버리고, 돌아오는 건 위로의 손길이 아니라 왜 이런 성스러운 곳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느냐는 손가락질이었다. 그래,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지금 쫓겨나도 내가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그 위안,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 아닐까.

 

 

아마도 다시 성당문은 닫힐 것이다. 다시 누군가 위로를 필요로 해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하나...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만은 택하지 않길. 그 누구도.

배여사가 씀
Posted by 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