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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엽(시인) / 2009년11월14일 22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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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진짜가 되었네~
- 좌충우돌 홍콩 아시아 인권위 인권학교 참가 후기
현재 대통령을 하도 잘 둔 덕분에 일복이 넘쳐나 하루에도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던 어느 날...
나보다 한 10배쯤 바빠 보이는 한 활동가가 급 이런 말을 꺼냈다.
‘나 홍콩 갈까?’
대뜸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귀를 쫑긋 세웠더니 결론은 놀러간다는 것은 아니었다. 홍콩에 ‘아시아 인권위’라는 단체가 있는데 6월 말에 그곳에서 아시아 지역 인권활동가들이 모여서 각 나라 인권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토론도 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활동가 참여자로 그 분이 추천되었고 같이 활동하는 다른 활동가들도 적극적으로 그 분의 등을 떠밀었다. 사실 그 자리를 봐서 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서 잠시 떨어져 생각도 정리하고 돌아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 분도 이래저래 복잡하지만 홍콩을 가기로 결정했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또 어느날..
홍콩을 가기 이주일 전이었던가? 급 이렇게 물어왔다.
‘야 홍콩 너가 가면 안돼냐? ^^’
‘엥? 이게 무슨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설마 나보고 진짜 가라는 것은 아니지?’
사실 그런 기회를 다 마다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인권 활동을 하면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는 어떤지, 다른 나라 활동가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고 배우고 싶은 생각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설마가 진짜가 되었고 어쨌든 갔다 왔다는 것이다. 어찌 어찌해서 가기로 맘먹고 홍콩 쪽 상황도 들어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의견을 구하니 가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긴장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 없이 가는 자신감 부족과 그 동안 갈고 닦아 놓은 언어도 없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2주의 시간동안 최대한 준비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한국 상황을 이야기할 자료도 찾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문제는 좋은 영상이 있더라고 자막 작업이 쉽게 될 수 없었다. 결국 최대한 말로 잘 풀어 보기로 하고 홍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떨림이었다.
홍콩에 무사히 도착하고 난 후 일정표를 좀 더 세밀하게 훑어보았다. 사실 대충 국제인권회의정도의 상을 그리고는 갔지만 부끄럽게도 행사 전체 제목도, 단체성격도 제대로 모르고 갔다.
3년이 넘게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국내가 아닌 다른 국제적인 인권단체에 대한 관심이나 고민은 그닥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UN인권위나 국제엠네스티 정도였다. 아시아 인권위 또한 이번기회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1984년에 만들어져 나름 오랫동안 활동을 만들어온 단체였다. ‘아시아 인권위 folk school'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시아 인권위가 주최하는 인권학교라고 해야하나? 아시아 인권위(AHRC)에서 해마다 이런 자리를 만드는데 올해가 가장 긴 일정(3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인권학교를 다양한 국가 활동가들을 모아서도 하지만 원하는 국가나 지역이 있으면 찾아가서 인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3주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은 이렇다.
인권활동가는 어때야 하는지, 인권운동을 하면서 부딪히는 지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을 했다. 구체적으로 의제별 토론으로 들어가면서 자유권(ICCPR) 그 안에서의 신체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표현의 자유 등을 이야기하였고, 사회권(ICESCR) 속에서 개발의 문제, 노동권, 식량권, 교육권, 건강권, 여성권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각 나라별 상황과 인권문제에 대해서 서로 공유하는 자리도 가졌다. 물론 한국에 상황도 이야기하였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하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 후퇴와 여러 가지 반인권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다행히 현지 한국 활동가 분이 많은 도움이 되어서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식 프로그램은 아니였지만 용산참사를 그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영화 편집 본 영상도 함께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몇 몇 활동가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함께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지만 참가한 활동가들도 다른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국제적으로 큰 사건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활동가들은 한국은 나름 ‘국가인권위회’도 있고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군사정권, 군사주의 속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저널리스트, 활동가들이 고문 등 인권침해를 당하고 심지어는 아무도 모르게 암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시기적 차이만 있을 뿐 과거 우리나라 군사정권 때 도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가. 어디를 가나 지배 권력의 야만은 비슷한가 보다. 결국 ‘인권’의 중심에서는 국적은 필요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인권이 바로 우리의 인권이고 우리의 인권이 그들의 인권이기에...
또한 홍콩에서 정부와 민간 기업들의 부패와 비리를 감시, 견제하는 홍콩 부패방지위원회(ICAC)도 방문하였다. 한국도 부패방지위원회가 있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홍콩 ICAC 역사와 기능 역할 등에 대해서 들었는데 한국과 질적으로 달랐다. 한국의 국가인권위도 그렇지만 어떤 국가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기관이 그 일을 하기위해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인권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미디어 활용방법에 대한 교육 시간도 있었다. 참고로 이번 교육 끝나고 돌아와서 가장 처음에 한 것이 ‘gmail’ 메일주소를 만들었다. 한국정부의 무시무시한 개인정보 압수수색도 그렇고 글쎄 참가자중 나만 ‘gmail’을 안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알고 보니 ‘gmail’이 압수수색에도 강하지만 ‘구글’이 여러모로 활용할게 많이 있었다. 언어만 어느 정도 된다면 ‘구글’을 통해 국제 활동가들과의 커뮤니티나 소통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국내의 상황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3주라는 시간이 언제갈까하고 많이 부담스러웠는데 지나고 나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사실 초반 3일은 죽을 것 같았다. 말은 못 알아듣겠지 아는 사람은 없지..그래도 그냥 보내기는 아까운 시간이기에 아는 단어가 나오길 바라며 귀를 집중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더라. ^^ 하루의 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혼자 걸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되뇌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부담의 마음은 버리고 할 수 있는 만큼 느낌이 오는 만큼 하기로했다. 그러니 사람들과도 손짓발짓 눈빛으로도 친해 질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설마로 시작해서 진짜가 된 이번 경험이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3주의 시간을 여기에 고스란히 닮을 수 는 없지만 그때의 기억과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만들어 가고 싶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열정적으로, 조금 더 여유롭게 나의 길을 가고 싶다. ‘인권’과 ‘인권운동’ 그리고 ‘삶’이라는 이 세 가지가 아직 내 인생에 착 달라붙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눈길이 가는 그것이기에 좀 더 열심히 찾아보겠다.
요즘 뜨는 광고처럼 ‘wow'라는 감탄사가 'olleh(ole)'로 터져 나오기를 바라면서...
olleh~메달^^
감사합니다, 스님...- 김진혁PD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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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광수
낭독 김지수
피아노 : 구혜선
♬ 구혜선 자작 즉흥곡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대화에서 서툴다.
어떤 사람은 화해에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이별에 서툴다.
어떤 사람은 일이 서투르고 어떤 사람은 젓가락질이 서툴다.
어쨌든 그들은 서툴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스스로 괜히 못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 서투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상일이 원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법인데
잘 풀리는가 싶다가도 꼬이기 일쑤인 게 인생인데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계속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바람둥이도 차일 때가 있고,
아무리 말을 잘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서투르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다만 서투르다는 사실을 느끼거나 인정한다면
나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지자.
서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너무 인색하다.
서툴다는 것은 죄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서툰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미 서툰 사람이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모르는 그래서 잘 배우려는 학생일 뿐이다.
그러니 조금만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자
그것이 바로 서툰 사람들이 손톱만큼이라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글 이외수
낭독 구혜선
기타 : 서정실
♬ <Etude in A Minor Op.60, No.7> ... M. Carcassi 曲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신중하라.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글 김현석
낭독 박철민
아코디언 : 신지아
♬<Tico Tico>... Zequinha Abreu 曲
나는 비광
섯다에는 끼지도 못하고,
고스톱에선 광 대접 못 받는
미운오리새끼
나는 비광
광임에도 존재감 없는 비운의 광.
차라리 내 막내 비 쌍피가 더 인기 많아라.
하지만 그대,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주오
그대가 광박 위기를 맞을 때 지켜주는 것은
나 비광이요.
그대의 오광 영광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은
나 비광인 것을.
나는 비광.
없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슬픈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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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중 낭독]
문신
철없던 시절,
내 몸뚱어리는 도화지였네
처음 그렸던 것이 진돗개.
형님한테 평생 충성하고 싶어서였네.
두 번째 그린 것이 고양이
호랑이 그리려다 잘 못 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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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2]
소설 『태백산맥』중에서
글 조정래
낭독 박철민
피아노 : 이 경/ 아코디언 : 신지아
♬<꽃밭에서>... 권길상 曲
광조는 씨익 웃으며 덕순이의 손을 잡았다. 둘이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똑 엄니 한숨맹키로 길다.”
광조가 불쑥 말했다.
“머시가?”
덕순이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방죽 말이여.”
“방죽이 엄니 한숨맹키로 길어?”
덕순이는 의아해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죽길은 끝없이 뻗쳐 있었다.
동생은 어째서 어머니의 한숨을 저 방죽길처럼 길다고 했을까.
어머니가 밤낮없이 내쉬는 한숨을 이어놓으면 방죽길만큼 길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도 못 들어간 쪼깐헌 것이…… 덕순이는 그런 생각을 하는 동생이 갑자기 철들어보이기도 했고 건방지게 느껴지기도 해서 입을 삐죽였다.
포구에는 물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갈숲만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아부지는 얼굴도 몸도 뻘건 디는 하나또 웂는디 워째 사람들은 아부지보고 빨갱이라고 헐까?”
덕순이는 대답이 난감해졌다.
공산당의 이름이 빨갱이인 줄만 알았지, 어째서 빨갱이라고 하는지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공산당 이름이 빨갱이제.”
“글먼 성이 공산당이고?”
“금메……?”
덕순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디 워째 순사나 군인덜 이름이 파랭이가 아녀?”
“고런 걸 나가 워치께 아냐.”
덕순이는 그만 짜증스럽게 내쏘았다.
“학교 댕김스롱도 고런 것도 몰러?”
“학교서는 고런 것 안 갤친께 모르제.”
“치이, 니 공부 잘헌다는 것 순 그짓말이여. 다 넘덜 시험지 보고 써서 점수 잘 받은 것이제.”
덕순이가 동생의 손을 홱 뿌리치며 걸음을 멈춰섰다.
“니 참말로 분 질를껴?”
동생을 노려보고 있는 덕순이의 기세는 안고 있는 단지를 곧 내동댕이칠 것만 같았다.
“누나는 고런 걸 다 안 줄 알었는디……”
광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금방 기가 꺾이는 동생을 보자 덕순이는 마음이 짠해졌다.
“누나, 나 똑 하나만 허고 잡은 일이 있는디.”
광조가 덕순이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또 무신 뜽금웂는 소리 헐라고 그러냐?”
덕순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그 아무도 웂는 디서 아부지럴 목 터지게 불러보고 잡은디……”
누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광조의 눈은 간절했다.
“그려, 나랑 항꾼에 허자.”
덕순이는 안고 있던 단지를 마른 풀섶에다 내려놓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근디 말이다, 읍내럴 보고 소리질르먼 안돼야.” 덕순이는 읍내를 후딱 돌아보며 말했고, “하먼 순사가 들으먼 워쩌라고.” 광조가 재빨리 대꾸했다.
“하나, 둘, 셋 허먼 항꾼에 허는 겨. 자아, 하나아, 두울, 셋!”
아부우우지이이이 -
선수머리를 향해 선 덕순이와 광조는 허리가 차츰차츰 구부러져 반으로 접힐 때까지 목청을 뽑고 있었고, 바람은 둘이의 긴 외침을 멀리멀리 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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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중 낭독]
“아이고 요런 문딩아, 공산당 헐라먼 애시당초 장개럴 들지 말든지, 장개럴 들었으면 새끼덜이나 싸질르지 말든지. 지리산 호랭이가 칵 씹었다가 도로 뱉을 요 문딩아, 나만 새끼들허고 어찌 살라고 혼자 내빼능겨.”
-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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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3]
목마와 숙녀
시 박인환
낭독 박철민
피아노 : 이 경 / 아코디언 : 신지아
♬ <L’hymne A L’amour> ... Marguerite Monnot 曲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김수환 추기경 추모행렬을 바라보며.
돌아가다. 돌아가시다. 아마도 ‘돌아갔다’의 뜻은 원래 있던 곳, 제자리로 다시 갔다는 뜻일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사람의 죽음 앞에 ‘돌아갔다’라는 표현을 쓴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다.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갔다. 천주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종’.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사무실이 바로 명동성당 근처인지라, 사무실 바깥을 나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왜냐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기 때문이다. 두 세시간씩 밖에서 서 있다 보면 사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며 재미거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참으로 뻘쭘할 뿐이다. 게다가 두 세시간씩 서 있다보면 안 그래도 추운데 마려운 오줌은 더 마렵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큰 건물 화장실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하고, 우리가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다른 회관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4일 동안 업무중지하고 화장실 안내만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야박해보일지라도 냉정하게 ‘회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 주세요’라고 했다.
나의 영혼이 절반은 가출한 상태로 멍해있고 피곤했던 나는 몹쓸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올랐다. 아놔. 줄 서 있는 사람이 대략 2km는 족히 되어보였다. 세종호텔 다음 건물을 끼고 골목까지 돌았으니 말이다. 그때 시간이 대략 11시. 허허허..나는 명동역으로 가서 카드를 찍고 플랫폼까지 내려갔다. 또 아놔.. 보이는 건 까만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쫘악 깔려있는 것이다.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돌려 다시 카드를 찍고 나와서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옷에 ‘근조’핀을 꽂고 있는 사람들이 택시를 잡고 있었고, 이곳은 콜택시를 불러도 불가능해보여 을지로입구역으로 갔다. 뭐, 별반 상황이 다를 건 없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으로 콜택시를 불렀는데 정말 운 좋게 십분 뒤 탑승 성공 했다. 택시기사분께 이 택시를 타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리니 아는 택시 기사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명동에 손님이 많다고 빨리 가라고 보챈다. 뭐, 누구는 일산 화정에 있어서 못간다나 어쩐다나..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깊은 신앙심이 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고백성사라는 건 언제 봤는지 까마득하고, 예수는 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제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며(정말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이 보수적인 한국천주교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할 뿐이다.
방금 뉴스를 보니 대략 20만명의 사람이 조문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어떤 면상을 들고 나타날 용기가 있었는지 전 재산 29만원 전두환이도 왔다갔다. 죽은 사람 앞에 나타나서 인사하면, 지나간 과오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마치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역사와 화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걸까. 전 재산 29만원 전두환이는 까만 쎄단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늬 총머리로 죽어간 사람들 앞에도 그렇게 나타나 조문을 할 수 있겠냐, 고 텔레비전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씨발놈.
김수환 추기경은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당시 그는 민주화운동의 큰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그는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실망을 더 안겨주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상세한 내용은 뭐 쓸 필욘 없겠다. 종교를 떠나 김수환 추기경은 어쨌든 큰 위안이 되어주었던 사람이었던 건 맞는 것 같다.
과연 천주교의 거물이 선종했기 때문에 20만명의 사람들이 두 세시간 씩 찬바람 맞으며 서서 기다리며 조문을 하는 걸까? 천주교 신자로서 추기경이 선종했으면 당연히 조문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 이틀동안 바로 옆 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정리된 생각은, 단순히 종교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싫든 좋든 저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비단 천주교 신자들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 앞에 슬퍼하고 아쉬워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나이가 들면 죽는 건 당연한건데, 마치 자기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슬퍼하고 추모한다. 왤까. 왤까.
지금의 이 시대.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최근 몇 년간의 행적이 아닌, 그 때 받은 그 위로들을 기억한다. 다시 비슷한 시대가 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그 때의 그 위로를 떠올린다. 일종의 위로와 위안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억울하고 차가운 마음들을 받아줄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문전박대를 당하고 어디를 가도 87년 그 때나 지금이나 쌩떼거리 쓰는 짓으로 치부되는 건 매한가지다. 누구에는 떼쓰는 것처럼 밖에 안 보여도 그 누구에게는 그 사람의 삶이 걸려있는 절박함, 누구에게는 문전박대해서 내보내도 괜찮겠지만, 그 누구들에게는 더 이상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절박함. 이 절박함을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안아 줄 곳이 없다. 이 서러움을 풀 곳이 없다. 가슴 한 켠 쓸어내려주는 손길이 없다.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행렬을 보며 사람들은 단순히 김수환 추기경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짓밟아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세상, 내가 이기지 않으면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는 세상, 87년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고 했던 그곳은 툭하면 경찰이 막아버리고, 돌아오는 건 위로의 손길이 아니라 왜 이런 성스러운 곳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느냐는 손가락질이었다. 그래,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지금 쫓겨나도 내가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그 위안,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 아닐까.
아마도 다시 성당문은 닫힐 것이다. 다시 누군가 위로를 필요로 해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하나...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만은 택하지 않길. 그 누구도.
배여사가 씀